선조유적

이곡사

이곡사는 시조 춘계공 이하 14위의 조상 위패를 배향하고 있는 사당

중흥비

중흥비는 원주이씨의 화합과 영원한 발전해 건립되었다.

추원단비

선조님들의 덕을 기리고 추모하고자 가문의 역사와 숭조사상을 높이고 그 정신을 계승

  • 8세 중시조 희백공 묘소

시조(始祖) 춘계공(椿桂公)의 8세손 휘(諱) 희백공(希伯公)은 고려조(高麗朝)에 남부부령(南部副令)의 관직을 지냈으며 일행천리(一行千里)하는 조화무쌍(造化無雙)한 희귀인재(稀貴人材)였다.

공(公)은 생존시 송도(松都)에서 유언(遺言)하기를 “만고에 내가 세상을 뜨거든 나의 묘지는 수로(水路)에 운구(運柩)하여 정박지점(碇舶地点)에서 구산(求山)하라” 하였으므로 하세(下世)한 후 사자(嗣子) 휘(諱) 녹규공(祿圭公)이 유언(遺言)을 받들어 고위영구(考位靈柩)를 배에 모시고 남한강 상류로 수로운구중 현 간현前안섬강나루터에서 해가 저물어 정박하고 다음날 아침에 출선(出船)하고저 하였으나 배가 교착(膠着)되어 불리(不移)하므로 상주(喪主)인 공(公)이 전날 밤의 선고유언(先考遺言)이 현몽(現夢)으로 계시(啓示)됨을 상기하고 동반한 지사(地師)와 의논하여 근방에서 구산(求山)하게 이르러 현 이목동(梨木洞)의 선고묘지(先考墓地)가 길지(吉地)임을 탐구하고 명당(明堂)을 정하여 안장하였다 하며, 이곳 산세는 치악산이 주봉이고 좌편으로 백운산 문필봉(白雲山文筆峰)이 연하여 장장장엄(長長莊嚴)한 산맥의 정기가 길지(吉地)에 응결되고 부배형국(俯拜形局)의 삼태산(三台山)을 바라다보는 인산지수(仁山智水)의 절경지지(絶景之地)이며 진검상절병형(眞劍上節柄形)인 동시 괘등형국(掛燈形局)이고 이중삼중으로 청룡백호(靑龍白虎)가 옹위(擁衛)하고 있으며 이목동입구(梨木洞入口)의 섬강수(蟾江水)는 등유(燈油)에 비하여 천만년을 장유불식(長流不息)하고 영세(永世)에 마르지 않을 것이므로 후손이 크게 번성하고 문관(文官)보다 무관(武官)이 많이 배출되었다고 전하여 오고 있다.

이로 인하여 후손들이 원주일대를 터전으로 삼고 군거(群居)하여 집성지(集成地)를 이루고 있으며 부령공(副令公)을 중시조(中始祖)로 모시고 추모(追募)하고 있다.

부령공묘갈명(副令公墓碣銘)은 표면에 큰 글씨로 ‘高麗南部副令李公希伯之墓’라고 쓰고 그 뒷면에 ‘皇明崇禎後 二十四年(一六六七년 丁未 九月이)라 써서 건립하였다.

  • 9세 녹규공 묘소

표면에 큰 글씨로 ‘정순대부판위위시사이공녹규지묘(正順大夫判衛尉時事李公錄圭之墓)’라고 썼고 뒷면 음기(陰記)에 다음과 같이 썼다.

『공은 원주의 대성(大姓)인 이씨로 국자진사(國子進士) 휘 수승(守升)의 후손이다. 증조부(曾祖父)의 휘는 공량(公亮)인데 은거하고 벼슬하지 않았으며, 조부(祖父)의 휘는 인비(仁庇)인데 판도총랑(版圓總郞)을 지냈다. 아버지의 휘는 희백(希伯)인데 남부부령(南部副令)을 지냈고, 응양상장군(應揚上將軍) 원충갑(元沖甲)의 딸에게 장가 들어서 공(公)을 낳았다.

공은 고려 조정에 벼슬하여 판위위시사(判衛尉時事)에 이르렀다. 아들의 휘는 임(琳)인데 동정주부(同正主簿)이였고, 또 아들 휘 인(璘)은 종부사령(宗薄寺令)으로 치사(致仕 ; 나이가 많아 벼슬을 사양하고 물러남. 역자 주)하였으며, 아들 휘 침(琛)은 강원도절도사(江原道節度使)였는데 딸이 금성 부원군(金城府院君) 최철(崔哲)에게 시집갔다.

세상을 빛낸 벼슬을 한 자손들이 많았을 뿐 아니라 조정에 벼슬하여 장상(將相; 장수와 재상의 합칭어. 역자 주)의 지위에 오른 외손들도 손꼽지 못할 정도로 많으니, 이는 공이 쌓은 덕이 많아 그 경사가 후손에게서 피어난 증거라 할 수 있다. 묘는 원주시 호저면 대덕리 대덕동 간좌곤향(良坐坤向)으로 자리하였다.

만력39년(광해군3년. 서기1611년. 역자주)에 8대손 첨지(僉知. 관명. 첨지중추부사. 역자주) 봉(逢)과 현감 응엽(應曄), 사성(士誠),광백(光白)과 군수(郡守) 정수, 인민(仁敏) 생원(生員) 택(澤), 외손인 판서 강신(姜伸), 참의 남이공(南以恭),승지 정각(鄭穀), 병사(兵使) 이응해(李應懈),이응표(李應彪), 군수 원욱(元彧), 주서(注書) 원탁(元鐸)등이 작은 빗돌을 세웠었는데 돌이 부서지고 상석(床石)도 없었을 뿐 아니라 만력무자(萬曆戊子. 선조시. 서기1588. 역자주)이후 백여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빗돌머리 부분이 깨어지고 글자획이 마손되었다. 이에 후손인 군수(郡守) 만득(晩得)과 통덕랑(通德郞) 석정(碩禎), 유학(幼學) 정표(廷杓), 석한(碩漢),비형(鼻亨),석지(碩祉),만중(萬重),덕방(德芳), 진화(進華) ,덕관(德寬) 등과 첨지 문한(文漢) 및 외손인 당시 원주 목사 이창령(李昌齡), 횡성 현감(橫城縣監) 정우주(鄭雨柱) 등이 서로 의논하고 출력(出力. 돈을 냄. 역자주)하여 다시 빗돌을 세우고 상석까지 설치하여 오래도록 전하려 한다.

승정 갑신후 65년(숙종34년, 서기1708. 역자 주) 2월에 세움 생원(生員) 정반(廷撮)은 삼가 쓰다. 』